1453년(단종 1년) 10월 10일(음력). 수양대군이 김종서(1383~1453) 등을 제거하고 반대파들을 숙청하여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은 1979년 신군부 세력이 주도한 12.12 군사반란과 너무나 닮아있다. 

우선 김종서가 단종을 모반했다는 증거가 없었던 것처럼 12.12 당시 정승화 계엄 사령관이 박정희 대통령 시해에 연루된 증거정황이 없다.

한밤중에 수양대군이 김종서의 집으로 가서 김종서를 격살한 뒤, 경복궁으로 달려가 단종의 재가를 받아 국정을 장악했다.

1979년 12월 12일 저녁. 全 합수부장이 鄭 총장을 체포한 뒤 다음날 새벽 崔 대통령의 수사착수건의서 재가를 득한 것과 흡사하다.

계유정난 이후 `나라를 안정시켰다'며 한명회(1415~1487) 등 43명을 정난(靖亂) 공신에 책봉했던 것처럼,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샴페인을 터뜨리며 제5공화국에서 여러 정부 요직을 차지하여 정치권력의 핵심부를 장악했다.

수양대군은 단종을 위협과 협박으로 축출하고 7대 세조로 즉위한 것은 全 합수부장이 崔 대통령을 하야(下野) 시키고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된 것과 동일하다.

◆ 1공수·3공수·5공수여단... 군사반란의 중심에 서다 

23시 55분 김포 주둔 1공수여단 4개 대대 800여 명의 병력이 여단을 출발하여 00시 05분 행주대교 통과, 00시 45분에 수색 검문소를 지나 01시 52분경에 국방부를, 02시 15분경에 육군본부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특전사령관 정병주가 있는 특전사령부 본부는 3공수 여단장 최세창의 명령을 받은 예하 15대대장 박종규 중령에 의해 특전사령관 정병주는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특전사령부를 장악한 3공수여단은 02시 장갑차 10대, 군용 트럭 26대 등 2개 대대 640여 명의 공수 부대원들을 동원하여 02시 20분에 천호대교를 지나 경복궁 중앙청으로 진격했다.

3공수여단이 출동할 무렵, 장기오 5공수 여단장 역시 480명 규모의 공수부대 병력을 육군본부 쪽으로 출동시켰다.

노재현 국방부장관,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황영시 1군단장, 박희도 1공수 여단장, 최세창 3공수 여단장, 장기오 5공수 여단장, 구창회 9사단 참모장, 이필섭 9사단 29연대장, 김진선 수경사 상황실장, 신윤희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노재현 국방부장관,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황영시 1군단장, 박희도 1공수 여단장, 최세창 3공수 여단장, 장기오 5공수 여단장, 구창회 9사단 참모장, 이필섭 9사단 29연대장, 김진선 수경사 상황실장, 신윤희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각 검문소가 무방비가 된 것에는 당시 수경사 상황실장으로 있던 김진선 중령의 공수여단 병력 통과지시가 유효했다. 김진선 중령은 이러한 공헌으로 12·12 이후 하나회에 가입했다.

3공수여단 병력은 경복궁에 진주하였으며, 5공수여단은 육군본부 방향으로 향하였으나 이미 1공수에 의해 상황이 완료되었으므로 효창운동장에 진주하였다.

한편 3공수여단의 반란으로 3공수여단 영내에 있던 무방비 상태의 특전사령부가 쉽게 반란군에게 접수되자, 1981년 4월 17일 경호친위대 성격으로 특전사령관 직할부대인 707특임대가 창설되었다.

◆ "1979년 12월 12일은 대령들의 밤이었다"

노태우 9사단장은 참모장 구창회 대령에게 출동 명령을, 참모장은 29연대장 이필섭 대령과 30연대장 김봉규 대령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30연대장 김봉규 대령이 부대 출동 명령 하달을 확인차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대 이상 없습니다. 50분에 출동하라고 지시받았습니다.” “여보세요. 응 뭐라고.....” “출동하라고 지시받았습니다.” “어딜 출동하라고? “ “우선 삼송리 까지 가라고 말입니다.”

“어디“ “삼송리.” “누가 출동 명령을 내렸는데... “ “사단장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사단장? “ “예, 사단장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거 출동 하면 안 되겠는데.“

“내가 다시 사단에 연락할게. 좀 기다려. “ “알았습니다. 전 사단 지시받겠습니다.” “응, 우선 출동하지 말고 기다려요. 출동하면 안돼.”

출동 사실을 확인코자 이건영 3군사령관이 9사단 참모장 구창회 대령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참모장은 "연대 출동 안 합니다"라는 허위 보고만 반복했다.

중앙청 앞에 등장한 탱크
중앙청 앞에 등장한 탱크

29연대가 02시 20분에 당시 고양군 벽제읍 주둔지를 출동하였다. 

이필섭 대령이 지휘하는 29연대 가운데 1개 대대가 한강 하류를 경계하고 있었으므로 30연대에서 1개 대대를 배속받아 서울 시내를 향해 진군하였다. 03시 30분 9사단 29연대 1390명의 병력이 중앙청에 진주하였다. 

황영시 1군단장의 명령을 받은 이상규 2기갑여단장은 대전차 포탄과 고폭탄을 실은 전차 35대와 병력 180명으로 구성된 예하 16전차 대대를 주둔지에서 02시 30분경 출동시켰다.

황영시 1군단장의 출동 명령을 받은 박희모 30사단장은 송응섭 대령이 지휘하는 90연대를 삼송리에서 03시 30분경 출동시켜 29연대와 2기갑을 후속하여 서울로 진입시켰다.

전차대대는 9사단 29연대와 합류한 후 1군단 헌병단장 최동수 대령을 선두로 1번 국도 도로상 여러 검문소를 지나 03시 15분에 구파발을 통과했다.

30사단장과 90연대장은 하나회 소속이 아니었으나 직속상관인 1군단장의 명령을 결국 충실히 이행하여 반란군 세력에 가담했다. 2기갑여단 16전차대대가 03시 25분에 경복궁 중앙청을 점령했다.

◆ 60만 대군, 새벽에 동원된 5,000여 명의 병력 앞에 무릎 꿇다 

서울의 중앙청까지 점령되자 이제 남은 건 수경사 하나뿐이었다. 13일 01시30분 30경비단 편에 있는 전차대대 본부로부터 "장태완을 사살하라"는 무전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수경사령관 취임 직후 장태완 수경사령관(가운데)가 33경비단 구역에서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지휘봉 든 자)과 수경사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오른쪽 팔을 뻗은 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수경사령관 취임 직후 장태완 수경사령관(가운데)가 33경비단 구역에서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지휘봉 든 자)과 수경사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오른쪽 팔을 뻗은 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12월13일 03시경 그렇게도 찾아 헤맸던 노재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8시간 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이때는 이미 반란군 부대에 의하여 서울이 완전 장악되고 있을 때였다. “장태완! 너는 왜 자꾸 싸우려고만 하나?”가 국방장관의 첫마디였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그러면 지금부터 장관님께서 어떻게 하라는 지시를 내려주시겠습니까?” 했더니 “야! 부대 철수시키고 상황을 끝내!” 라는 지시를 내렸다. 

노재현의 지시에 대해 장태완은 "네 알겠습니다"라며 "그것이 장관님의 명령이시라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승복했다. 그는 "장관님, 제가 복명복창을 하겠습니다. 이 시간부로 상황을 끝내겠습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참모차장과 육본 참모부장들을 향해서 "12월 13일 03시부로 일체의 전투 행위와 사격을 중지시키고 모든 부대에 즉시 원상복귀를 지시하겠다"고 보고했다. 

장태완은 全 합수부장으로부터 체포 및 연행 지시를 받은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에게 체포되어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되었다.

12월 13일 낮 광화문에 주둔 중인 쿠데타군.
12월 13일 낮 광화문에 주둔 중인 쿠데타군.

이 과정에서 육본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이 가슴 관통상을 당하고 진압군 지휘부가 와해되었다.

이날 12.12 쿠데타 반란군이 동원한 병력은 공수부대 2,000여 명 등 모두 5,000여 명으로, 60만 대군은 새벽에 동원된 이들 병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쿠데타에 성공한 정치군인들은 12월13일 보안사에서 승리를 축하하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13일 군 인사 발표를 통해 노태우 소장이 수경사령관, 정호용 50사단장이 특전사령관, 황영시 중장이 육군참모차장, 유학성 중장이 3군사령관, 백운택 준장이 9사단장, 박희도 준장이 26사단장, 조홍 대령(준장)이 육군본부 헌병감에 임명되었다.

12·12 직후 대통령의 군 인사권 행사 상당 부분이 반란군 의도대로 이루어졌다. 이들 쿠데타 세력은 이전 박정희 시대 군부 집권세력과 대비하여 '신군부(新軍部)'라고 불렸다.

◆ 국방부장관의 행적과 사라진 시각

12.12 쿠데타 당시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성이 울리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로 가족과 함께 공관에서 빠져나와 단국대 교정을 통해 여의도 부하 집으로 숨어들었다.

부하의 집에 가족을 맡긴 후 육본 B-2 벙커로 이동해 상황을 보고받은 뒤 한미연합군사령부로 이동했다.

이후 국방부로 다시 이동하였다가 옥상 방공포 병력과 1공수여단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자, 국방부 청사 1층계단 밑에 들어가 숨어있다가 1공수여단 병력에게 발각되었다.

국방장관은 04시 10분 경 보안사령부로 강제 이동하여 全 합수부장을 만났다. 그리고 국무총리 공관으로 이동하여 鄭 총장에 대한 연행건 재가를 건의했다.

더는 버틸 수 없음을 느낀 崔 대통령은 鄭 총장 체포동의안에 '12월 13일 오전 5시 10분'이라는 재가 날짜와 시간을 적었다.

사라진 ‘시각’ 부록 1편 390쪽에 실린 ‘수사착수건의’ 문서. 최규하 당시 대통령이 ‘사후승인’했음을 알리며 적어 넣었다는 ‘12.13 05:10AM’은 보이지 않는다.
사라진 ‘시각’ 부록 1편 390쪽에 실린 ‘수사착수건의’ 문서. 최규하 당시 대통령이 ‘사후승인’했음을 알리며 적어 넣었다는 ‘12.13 05:10AM’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사후재가란 점을 표기해 놓은 덕에 향후 문민정부에서 열린 12·12 군사 반란 재판에서 하나회 일원들을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었다.

◆ 12.12쿠데타, 그날 주한미군은?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의 회고록 「벼랑 끝의 한국-12.12에서 광주항쟁까지」 에 따르면 위컴은 1979년 11월 말~12월 초 이형근 당시 합참의장으로부터 “육사 11기와 12기가 주축이 된 소장파 장성들이 소요와 반란을 조장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위컴은 12월 4일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유병현 연합사 부사령관에게 이같은 사실을 알려주었을 때 그들은 루머라고 간주했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2월 12일 당일 밤 노재현 국방장관은 미 8군 벙커로 피신해 위컴과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이 그 시각 신군부에 어떻게 대응했느냐에 따라 쿠데타의 향방이 바뀔 수도 있었던 중요한 순간이었다. 

이날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이건영 3군 사령관에게 동원을 요청한 수도기계화사단과 26보병 사단은 한미연합사령관인 위컴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는 부대들이었다.

그런데 당시 위컴은 “아직 어둡기 때문에 진압군과 반란군 간 오인충돌이 불가피하다”며 노재현 장관에게 부대 이동을 허가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사이 반란군측은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무력화시키는 한편 자신들에게 필요한 병력을 서울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쿠데타군의 병력 출동을 막지 못한 상황에서 진압군 출동을 막았던 위컴의 조치가 전두환의 반란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었다.

◆ 전두환 제거, 역(逆) 쿠데타

반란을 성공시킨 전두환이 위컴에게 면담을 요청했으나 위컴은 거부했다. 더 나아가 위컴은 한국군 당국에 전두환과 노태우 등 전방병력 무단이탈에 책임 있는 장성들의 군법회의 회부를 요구했다.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고한 1980년 2월 1일 전문으로 이범준 장군(General Rhee Bomb June)이라는 인물이 한국군 내 전두환 반대 세력의 움직임을 미국에 제보한 것으로 기록됐다.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고한 1980년 2월 1일 전문으로 이범준 장군(General Rhee Bomb June)이라는 인물이 한국군 내 전두환 반대 세력의 움직임을 미국에 제보한 것으로 기록됐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군 장성이 역쿠데타 계획에 관한 정보를 갖고 미국 쪽에 접근한 것이다.

한국군 장성이 제공한 정보는 전두환의 당초 계획은 군권 장악 후 민간 정부를 탈취하는 것이었으나 미국의 완강한 태도로 계획을 잠시 미루고 있다는 정보였다.

이밖에 비육사 출신 장교 90%와 육사 출신 장교 50%가 전두환을 반대한다는 정보와 30여명의 장성급 장교들이 전두환 제거를 계획한다는 정보였다. 

미국이 한국군 내 전두환을 몰아내려는 ‘역쿠데타’ 모의 관련 정보를 입수했지만, ‘군 내부의 분열이 12·12사태보다 더 큰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며 역쿠데타 쪽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전두환에게도 그 사실을 알린 뒤 향후 민간 정부를 넘보는 일을 기도한다면 불행한 결과가 초래될 것임을 경고함으로써 ‘역쿠데타 사건’을 매듭지었다. 

1980년 8월, 전두환이 체육관 선거로 11대 대통령에 당선된 날, 존 위컴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정희 피살 이후 가장 성공적인 미국의 한국 정책 가운데 하나는 전두환 정권의 수립이다. 우리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고, 그 보람도 크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STV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